
2019년 SBS에서 방영된 사극 드라마 ‘해치’는 조선의 21대 임금 영조의 즉위 이전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섞어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정일우, 권율, 고아라 등 주연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였으며, 기존 사극과는 결이 다른 인물 중심의 서사와 정치 드라마적 요소가 융합되어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본문에서는 ‘해치’의 전체 줄거리, 주요 등장인물의 관계와 성격, 그리고 작품이 남긴 의미에 대해 깊이 있게 분석한다.
‘해치’가 던지는 질문: 왕이 되려는 자, 그 자격은 무엇인가
‘해치’는 우리가 흔히 아는 ‘조선 영조’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그 시선을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 이 작품은 그가 왕이 된 이후가 아닌, 왕이 되기 이전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며, 그가 겪었던 편견과 외면, 그리고 스스로 군주의 길을 선택해야만 했던 운명을 깊이 있게 조명한다. 단순한 사극이 아닌, 한 인물이 시대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드라마는, 그 자체로 ‘인물 드라마’이자 ‘정치 드라마’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사회적 질문을 던진다. ‘연잉군 이금’은 숙종의 아들이지만,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이유로 왕실 내에서도 외면당하고 정치적으로도 배척받는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이 나라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 고민이 정치로 이어지고, 권력에 대한 분노와 회의, 그리고 책임으로 이어지는 그 흐름은 단지 한 왕의 전기를 서술하는 것을 넘어, ‘군주의 자격이란 무엇인가’, ‘지도자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으로 확장된다. 드라마의 구조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에서 벗어나 있다. 주인공은 시작부터 ‘강한 존재’가 아니며, 뚜렷한 목표를 가진 인물도 아니다. 오히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며,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분노한다. 이금은 자신이 왕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가 ‘왕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은 단순한 야망의 발현이 아니라 시대에 대한 책임감의 발화로 읽힌다. 이러한 드라마의 접근법은 인물들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며, 그 주변에 있는 조력자들 또한 단순한 장식이 아닌 독립된 인격체로서 작용한다. 여지는 사헌부 감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박문수는 원칙과 민심을 기준으로 한 정치관을 지니고 행동한다. 이들이 서로 간의 신뢰와 갈등 속에서 함께 성장해 가는 모습은, 이 드라마가 ‘누가 왕이 되었는가’ 보다는 ‘어떤 길을 걸었는가’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사극이라는 장르를 빌려 왔지만, 단순한 역사 재현을 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시청자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권력의 정당성, 리더십의 조건, 그리고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시대를 초월해 지금 이 순간에도 유의미한 주제로 작용한다.
‘해치’ 줄거리와 인물의 관계망 속으로
‘해치’의 줄거리는 숙종의 건강이 악화되며 후계자 문제를 두고 조정이 크게 요동치는 상황에서 출발한다. 노론과 소론, 남인 등 당시 정계의 핵심 세력들이 왕위를 둘러싸고 권력 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정치적으로 철저히 배제되었던 ‘연잉군 이금’이 차츰 주목받게 된다. 이금은 본래 정치에 뜻이 없었지만, 조정의 부패와 백성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점차 중심부로 들어서게 되고, 자신이 직접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금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는 사헌부 감찰관 ‘여지’이다. 여지는 단순한 여성이 아닌 조선 최고의 감찰관 중 하나로서, 권력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싸우는 인물이다. 그녀는 연정을 기반으로 한 조력자가 아닌,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적인 캐릭터로, 이금에게 날카로운 조언과 균형감을 제공한다. 또 다른 핵심 인물은 ‘박문수’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는, 백성의 편에 서려는 신념을 지닌 인물로, 이금과 정치적으로 깊은 연대를 맺는다. 그는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움직이며, 냉철한 판단력과 높은 도덕성을 통해 이금이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그의 존재는 이금이 권력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도덕적 거울’과도 같은 존재다. 반대편에는 ‘민진헌’, ‘이관재’, 그리고 숙종의 또 다른 서자인 ‘밀풍군’ 등이 있다. 이들은 기존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거나, 개인적인 야망을 위해 이금을 견제하고 제거하려 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들을 단순한 악역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그들 나름의 정치 철학과 국가관이 있으며, 그 방식은 비록 충돌하더라도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또 다른 해석으로 받아들여진다. 드라마가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사건의 전개가 단순히 왕위 쟁탈에 그치지 않고, 민생 문제, 부패 관료의 개혁, 정적 제거, 백성의 신뢰 회복 등 보다 넓은 정치적 지형을 다룬다는 점이다. 즉, ‘이금이 왕이 되는 과정’은 단지 정점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보이는 사회의 구조와 병폐, 그리고 인물들의 선택이 이 드라마의 핵심이다. 에피소드 하나하나에는 주제의식이 분명하게 담겨 있다. 탐관오리 척결, 무고한 백성의 억울한 죽음, 법의 공정성, 언론과 여론의 조작, 군주의 책무 등은 시대적 배경을 떠나 지금도 유효한 문제다. 이러한 주제들을 인물의 서사 안에 녹여냄으로써, 드라마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청자의 생각을 유도한다. 결국, 연잉군 이금은 여러 정치적 난관과 위협, 동료의 희생을 겪으며 조선의 왕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왕이 된 자’로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수많은 선택의 무게를 견뎌낸 인물, 그리고 그 대가를 알고 있는 인간으로 묘사된다. 이는 곧 군주란 무엇인가에 대한 드라마의 깊은 고민이자, 시청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시대를 넘어, 오늘을 비추는 사극의 거울
‘해치’는 단순히 조선의 한 시기를 다룬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왕이 되기까지 겪는 외로움과 책임, 선택의 무게를 통해, 오늘날 리더십과 정의, 정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정일우는 연잉군 이금을 통해 기존의 이미지를 뛰어넘는 연기 변신을 선보였으며, 그의 눈빛과 대사 한 줄 한 줄은 이 인물이 겪는 내적 갈등과 성장 과정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권율은 박문수를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을 잃지 않는 이상주의자의 얼굴을 보여줬고, 고아라는 여지를 통해 여성 캐릭터가 사극에서도 독립적이고 능동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연출과 대본, 배우들의 연기가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단지 ‘잘 만든 사극’이라는 평을 넘어, 시대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작품으로 남았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그 안에 인간의 고민과 결정을 섬세하게 녹여낸 이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단순한 재미 이상의 여운을 남긴다. 보고 나면, 우리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리더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도 끝없이 고민하고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고민의 흔적이 때로는 상처가 되고, 때로는 정의가 된다는 것. 그 점에서 단지 사극이 아닌,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로 남는다.